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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인물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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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구(洪思九 1878~1896) 상세보기 - 제목,작성자,작성일,조회수,첨부파일,내용 정보 제공
제목 홍사구(洪思九 1878~1896)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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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구(1878∼1896)는 을미사변 후 19세 소년으로 스승 안승우와 함께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남산성 전투에서 왜군과 격전 끝에 전사한 구국의 항일 애국 소년이다.

홍사구의 자는 우용(又容), 본관은 남양이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었고, 모친을 섬기는데 효성이 지극하며 형제간에 우애가 더욱 돈독하였다.

그 증조부 홍운이 누차 감사를 지냈고, 부친 홍성유도 벼슬길에 참여하였으며, 가사가 풍족하였으므로 매우 자유롭게 자랐다. 그는 또한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잡혀가서도 끝까지 굽히지 않고 싸운 삼학사 홍익한의 후손으로 지조 있는 가문의 출신이었다.

원래는 경북 순흥 태생으로 결혼 후 제천에 살았는데 이웃집에서 안승우 공을 보고 흠모하여 조석으로 가 뵈니 안공이 그 지성에 감동하고 그재질을 사랑하여 문하생으로 삼고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홍사구는 안승우의 가르침을 받아 덕기가 순수하고 문장이 찬란하며 공명정대하고 신의를 존중하니 주위 사람들은 그 위인됨에 기대하는 바가 매우 컸다.
고종 32년(1895)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 민비가 왜인에 의하여 시해된 뒤 안승우가 의병을 일으켜 중군장이 되자 홍사구는 스승의 종사관으로 용의주도하였고 충성으로 보좌하였다.
1896년 1월, 의병군은 유인석을 대장으로 삼고 안승우를 중군장, 홍사구는 그 종사관으로 왜병 1천여명이 주둔한 충주성을 공략하여 점령하였으나 수안보 전투에서 이춘영, 주용규 등 참모급 장수들이 전사하여 전세가 불리함에 제천으로 후퇴하였다.

4월 13일 왜군의 앞잡이 장기렴의 군대와 제천 남산성 전투에서 용전분투하였는데, 이때 마침 폭풍이 불고 비가 퍼부어 의병들은 조총에 화약을 다져 넣을 수가 없고 화승에 불이 꺼져 탄환이 나갈 수가 없었는데 비하여 안전지대에 있는 적으로부터는 총알이 우박같이 쏟아지므로 아군은 자연히 흩어졌다.
그러나 홍사구는 조금도 겁내지 않고 분전하였다. 스승 안승우는 피하라고 명령하며, "나는 이미 의병의 장수로 마땅히 죽을 때 죽기로 작정하였지마는 너는 왜 홀로 가지 아니하느나? 몸을 보존하여 후일을 도모하기를 바란다. "고 하자 사구는 대답했다.
"스승이 죽음에 이르렀는데 제자가 어찌 홀로 가오리까. 장수가 위태로움을 당했는데 따르는 군사가 어찌 홀로 면하겠습니까. 구차스럽게 면하는 것은 맹세코 하고 싶지 않은 바입니다. 지하에서도 길이 모시기를 원합니다." 드디어 굳게 서서 가지 아니하므로 안승우는 홍사구를 보내기 위하여 천천히 걸어서 성을 나가다가 적탄에 맞아 다리가 상하여 주저앉으니 홍사구는 되돌아와서 부축하고 곁에 모시고 있다가 함께 사로잡힘을 당하자 소리를 가다듬어 적을 꾸짖으며, " 너희들이 비록 짐승의 무리라 할지라도 극히 미미한 슬기가 있다면 반드시 충신과 역적을 분별하고 사람과 짐승의 분별을 알만할 터인즉 대의를 신빙하고 적을 막아내는 마당에 감히 이럴수가 있느냐 " 하고 칼을 뽑아 적괴의 목을 내려치니 분노한 왜병들이 휘두르는 칼에 그는 살해되고 말았으며, 스승 안승우도 손에 든 기를 굳게 쥐고 함께 죽었다.
홍사구의 그때 나이 19세이니 스승과 함께 전사한 애국 소년의 충의 의병 항쟁사에서 길이 빛날 것이다. 또한 그의 아내는 안중군장이 전사했다는 말을 듣고 땅을 치고 통곡하며 하는 말이,
"내 남편도 돌아갔구나." 하니 그 모친이 묻기를,
"지금 안중군장이 죽었다는 데 어찌 네 남편이 죽은 것을 아느냐?"고 하자
"지아비가 떠날 때에 소부와 더불어 이별을 하면서 말하기를, 지금 의병이 성공할 가망은 없고 오직 죽을 뿐인데 우리 스승께서는 반드시 순절하고 구차스럽게 살지 않을 분이니 나 역시 면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중군장은 소임이 커서 여러 사람이 그 죽음을 바로 알 수 있으나 종사관쯤은 졸병과 같은데 사상자가 사태나는 판에 어떻게 쉬이 알 수 있겠는가. 만약 안중군장이 죽었다는 말을 듣거든 나도 죽은 줄로 알라 하였으며, 어젯밤 꿈에 지아비가 와서 울며 이르기를 어머니는 늙으시고 아우는 어리니 집안 일을 어찌하랴. 바라건대 그대는 몸을 잘 보전하여 내 어머니를 잘 섬기고 내 아우를 잘 길러서 나를 위안해 달라 하였기로 아는 것입니다. "고 하였다. 그 어머니가 놀라고 의아하여 사람을 시켜 탐문한 바 관연 그러하였다.
많은 사람이 그의 죽음을 듣고 애석하고 통탄해 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그가 죽은 지 이틀만에 동지 박정수, 이용규가 적진을 헤치고 들어가 시체를 거두어 본가로 돌아와서 장사하였다.
다만 늙은 어머니와 약한 아내만 있으니 나이 어려서 자녀도 없으니 사람들이 더욱 애석하게 여겼다.

동지 박정수가 홍사구룰 제사한 글에,
" 공은 한 번 죽어 백세의 사표가 되었다. " 하였는데 과연 그의 곧은 충성과 큰 절개는 후세의 귀감이 될만하며,
이는 순국소년 홍사구의 애국정신을 후세에 전하여 거울로 삼고자 한다.
1963년 건국공로훈장 단상이 수여되었으며, 한말 제천에서 의병활동으로 순국한 홍사구의 묘지는 의림지 동남쪽 산중턱에 위치하고 있다가 2007년 4월25일 제천시 고암동 순국선열묘역으로 이장하였다.
묘역은 봉분의 높이가 1.8m,둘레는 10m정도이며 갓비, 둘레석, 상석등으로 꾸며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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